본문 바로가기
책,영화

고요한 상처의 언어,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

by 레드민트 2025. 6. 29.
반응형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 책 표지
한강 작가의 소설 희랍어 시간 책 표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한강 작가는 언어와 침묵, 그리고 고통을 시적으로 풀어내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중편 소설 『희랍어 시간』은 2011년 발표된 작품으로, 인간 존재의 깊은 상처와 상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치유의 시간을 담담하면서도 깊은 문체로 그려낸 수작입니다.

『희랍어 시간』은 그리스어 수업을 매개로 두 주인공이 서로의 내면에 다가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 소설은, 마치 시를 읽는 듯한 호흡으로 독자에게 상처와 회복, 고독과 연대를 천천히 이야기합니다.

줄거리와 인물

이야기는 한 대학의 그리스어 강의실에서 시작됩니다. 강사인 '나'는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언어를 가르치면서도, 현실의 언어를 거부하듯 삶과의 접점을 최소화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스어를 배우러 온 '학생'은 큰 사고를 겪고 목소리를 잃은 젊은 남성입니다. 그는 말하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 수업을 따라가며 '나'와는 말 없는 소통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두 인물은 둘 다 상실을 안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실패한 관계와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살아갑니다. 반면, 학생은 물리적으로 목소리를 잃었지만 삶에 대한 애착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 침묵하는 사람과, 언어를 가르치면서도 현실 언어를 차단한 사람이 만나면서 둘 사이에는 말보다 깊은 감정의 흐름이 생깁니다.

그리스어 수업은 이들에게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과거를 되짚으며 조심스럽게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는 '치유의 공간'이 됩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조용하고도 단단한 회복의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갑니다.

언어와 침묵, 그리고 회복의 미학

『희랍어 시간』은 언어가 가진 근원적 힘과 동시에,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감정과 진실이 있음을 말합니다. 한강은 이 작품에서 특히 ‘그리스어’라는 고대어를 통해 언어의 본질과 인간의 내면을 탐색합니다. 그리스어는 더 이상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죽은 언어이지만, 동시에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는 언어입니다. 그리스어를 배우는 것은 단지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는 경험이 됩니다.

두 인물은 서로를 향해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작은 행동과 수업 속의 시선, 호흡, 몸짓을 통해 서로를 이해합니다. 이는 한강 작가 특유의 정적인 서술과 맞물려, 독자에게 언어보다 깊은 '감정의 공명'을 느끼게 합니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통해 삶의 고통이 언어를 잃게 하더라도, 완전히 침묵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합니다. '말하지 않음'이 반드시 단절이나 단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침묵은 서로의 고통을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상태이며, 때로는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강 문학의 핵심 정서가 담긴 작품

『희랍어 시간』은 한강 문학의 핵심 키워드인 상실, 고독, 그리고 치유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입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절제된 문장과 빈틈 많은 묘사를 통해 독자가 자신만의 감정으로 이야기를 채워 넣게 유도합니다.

실제로 『희랍어 시간』의 문장들은 짧고 조용하지만, 여운이 깊고 오래 남습니다. 이는 한강 작가의 문학이 왜 전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을 말없이 껴안고, 그것을 견디는 시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슬픔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울림을 줍니다.

이 작품은 문학의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동시에, 우리가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느림’과 ‘침묵’의 가치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바쁘고 소란스러운 시대에, 『희랍어 시간』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귀한 시간을 선물합니다.

『희랍어 시간』은 화려한 서사도, 극적인 반전도 없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마치 고요한 호수와 같아서, 조용히 들여다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내면의 울림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치유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이 작품은, 한강 문학의 깊이를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마음이 지치고,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희랍어 시간』은 조용히 곁에 앉아 함께 있어주는 책입니다. 언어와 침묵, 고통과 회복의 경계를 묵묵히 걸어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다시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반응형